붓다필드는 이렇게 탄생했다

Q : 이제 드디어 붓다필드의 태동기라고 하는 젠풀의 ‘신비의 문’이 시작되는건가요? 
A : 스승님은 그 전부터 농담처럼 세상의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2002년 7월 15일. ‘사이트가 떴다, 시작하자!’면서 인터넷 사이트에서 질문과 답변란을 하게되었습니다. 
그게 ‘신비의 문’이라는 코너죠. 
처음에는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텔레파시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며칠간은 조회수가 10을 넘지 못했어요. 
저는 심심해서 친척들 주민등록번호을 알아내서 익명으로 질문을 올리곤 했습니다.

진지하게 물어보면 그에 맞는 답변을 해주셨는데, 제가 봐도 너무 훌륭한 답변들이 나오더군요. 
그래서 해피타오, 명상나라, 행성활성화, 신나이, 샴브라 등 관심을 가질만한 사이트에 홍보를 했습니다. 
스승님은 컴퓨터를 할 줄 모르고 타이핑은 처음 만져보는 사람 같았기 때문에 답변은 불러주시는 것을 제가 받아서 치거나, 
스승님이 종이에 써오시면 그것을 제가 타이핑해서 올렸습니다. 
한국보다 인터넷이 열악해서 타이핑을 하고나면 한참 후에 글자가 뒤따라 모니터에 뜨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불과 3년 전인데 말이지요. 
150메가 CPU, 32메가디램의 컴퓨터로 56K 모뎀으로 접속을 했으니까요. 
처음에는 저희 집에서 하다가 질문이 많이 올라오자 제가 스승님 댁으로 가서 타이핑을 해드리게 되었습니다. 
질문이 올라오면 즉문즉답으로 대답해주셨고, 어려운 질문은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선 방에 들어갔다 나오시고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스승님 댁에 그와 관련된 책은 없었어요. 
특별한 채널을 사용하셨나 봅니다.

하루는 일부러 늦게 갔는데 그 몇 시간 사이에 끙끙대며 겨우 2 줄을 쳐 놓으셨더군요. 
그것도 다 틀린 글자로 말이지요. 
그때는 제가 참 대우 받고 살았습니다. 
배 고플까봐 직접 음식도 만들어주고 그러셨으니까요. 
그렇게 한 달 가까이 지나자 조회수가 300을 넘으니 보람도 느껴지더군요. 
젠풀 열성팬도 생겼구요.

Q : 그 당시 어떠한 질문에도 막힘없이 답변이 나왔고 시원시원한 즉문즉답은 정말 센세이셔널 했지요. 정리하자면 삼덱님은 처음부터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만난 것은 아니었고, 스승님께서 오랜 시간 공들여 얻은 대들보였다는 얘기가 됩니다. 결국 신비의 문 광팬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의해 2 달이 못되어 9월 초 한국에 나오게 되지요? 
A : 
어느 책에 의하면 스승이 제자를 처음 맞이할 때의 설렘은 가장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는 것의 몇만 배의 지복감과 두근거림이라고 합니다. 
스승님께서도 약속시간은 다 되었는데 목욕탕에서 나오질 않으시고, 옷 매무새며 외모에 신경을 쓰는 등 전에 없는 행동을 하시더군요. 
아무튼 제자들과의 첫 만남을 선릉역에 있는 젠풀 사무실에서 가졌습니다. 
저는 온라인에서는 잘했지만 오프라인에서는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가슴이 두근거려 근처에 있는 호프집에서 맥주 3000cc를 마시고 나중에 들어갔어요. 
어색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분위기가 참 좋더군요. 
30~40명 정도가 모였는데 휴식 시간에 짜장면도 사주시는 센스까지 발휘하셨지요. 
1주일 후 다시 한번 젠풀 사무실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신비학, ufo, 채널링, 선문답 등 당시 모였던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정도였을 뿐 깨달음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으셨어요. 
본격적인 전공과목을 밝히신 것은 3번째의 만남 후인 운지사 회합 때부터였습니다.

운지사에 모이게 된 계기는 제자들이 너무나 황당무계한 이야기에만 정신이 팔려있으니까, UFO를 태워주신다며, 서울에서는 안되고 지리산으로 모이라고 한 것 때문입니다. 
보상비 때문에 폭설만 기다린다는 곧 쓰러질 것 같은 퇴락한 절에서 처음으로 법문을 하신 것입니다. 
UFO를 태워준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채널링 단체의 회원들은 귀빈 대접을 해주며 따돌리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1주일 후 서울에 돌아왔는데 세상이 달라보이더군요. 
그 후 게시판에 커뮤니티 기능을 활용해서 지리산에 모였던 사람들의 방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쯤 브라더후드라는 단체의 시비가 들어옵니다. 
‘진리는 비밀리에 전수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는데, 우리는 반대로 시스터후드라고 할까하다가, 비밀결사와 반대의미의 공개문파라는 이름을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무겁고 심각한 것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웃고 즐기면서 도닦자’라는 슬로건도 그때부터 시작되었지요. 
그렇게 지리산에 모였던 사람들이 주축이 된 공개문파는 채팅과 오프라인을 번갈아가며 계속 만났습니다.


Q : 붓다필드 초창기 모습은 다음에 더 들어보기로 하구요. 현재 붓다필드 월드센터 건립에 매진하고 계신데, 그것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참고로 붓다필드 회원들을 상대로 작년연말까지 2억 이상을 거두어 들임 
A : 
흔히 말하는 유체이탈이라고 하는 육체이탈은 수련의 기본입니다. 
견성한 사람은 자각이탈이 되겠지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한국에서는 자각이탈을 하더라도 상황이 안 좋습니다. 
쉽게 말해 영적 잡것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한국은 영적인 잡것들이 많아서 뉴질랜드에다 그많은 비용을 투자하는군.

물론 스승님 같은 마스터들의 통제하에 지도 받기도 어렵구요.

나를 찾는데 무슨 통제가 필요한지.

좋은 환경에서 영적으로 각성된 준비된 제자들이 수련을 해서 활동을 시작해야할 때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지구 시련기에 영적 서비스를 붓다필드가 해야합니다.

앞으로 다가올 지구 시련기는?

물론 이러한 천사반 뿐만 아니라 해탈반, 능력반 등 자신에게 맞는 전공을 선택해서 성장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붓다필드가 영성계에 알게 모르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그때는 명실상부한 능력으로 압도할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들도 느끼시겠지만 견성한 이상 육체를 갖고 더 이상 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육체를 갖고 그러한 수련 외에 더 이상 가슴뛰는 일은 없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칼을 쥐어주면 위험하듯이 아직까지 육체적 습이 많이 남아있는 제자들이 능력을 얻는 것에 대해 스승님께서는 단호하십니다. 
월드센터가 건립되면 준비된 제자들로부터 수련에 들어갈 것입니다. 
견성을 하면 의통은 기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카르마에까지 간섭해서 치료를 해주면 안되겠지요. 
붓다는 깨달음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마음의 치료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승님도 언급하셨듯 우리가 세속에 있었기 때문에 견성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수행자이면서 생활인으로서의 무게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경제활동을 하는지는 돌이켜 보아야합니다.

Q : 이번 월드센터 건립 기금 모금에 대해 스승님께서 언급하신 적은 없는지요? 
A : 
한 마디로 어이없어 하시죠. 
스승님께서는 스스로 제자들에게 제발 좀 절실해져 달라고 하는 스승이 어딨냐고 하시면서 여러 번 한탄하셨지요. 
공부할때도 좀 절실하라고 호소를 여러번 하셨는데... 
석가나 예수의 제자들은 멍청했지만 절실했죠. 
그리고 아이슈타인에게 구구단 가르치게 하신다며 제자들의 느린 성장을 질책하곤 했는데요. 
이번 건립 모금 운동에 대해서도 ‘세상에 어느 스승이 나서서 수련장을 짓자고 호소하겠느냐’며 실망스러운 기색이 역력하십니다. 
스승님 자신은 젊은 시절, 작은 깨침 하나라도 있으면 수억의 돈이 아깝지 않았다며, 
모금운동을 시작하면 하루이틀에 다 걷힐 줄 아셨답니다. 
교회나 절과 같이 관념을 숭배하거나 현실적 안위를 위해 건물을 짓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이 휴식과 편의 시설, 그리고 수련시설에 지어질 것인데 
제자들의 어리석음과 게으름을 준엄하게 질타하신 적도 있습니다.

Q : 월드 센터가 지어지면 어떤 상황이 전개될까요? 
A : 스승님께서는 견성인가를 하실 때 제자의 모든 전생을 스캐닝하시고 의식의 흐름이 바뀐 순간 인가를 해주십니다. 
그때 견성한 붓다의 특기도 함께 발견하시죠. 
그것은 차후 수련 과목 선정에 중요하게 작용할 것입니다. 
단순히 생각해봐도 제자들이 자각이탈을 자유자재로 하고 스승님과 같은 것을 보고 듣고 체험한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커뮤니케이션이 된다고 할 수 있죠. 
소위 말해 세상에 능력자라고 알려진 사람들의 능력이라는 것은 사실 말하기도 민망할 수준의 재주일 뿐입니다.


Q : 스승님께서 견성인가를 해주실 때 산고를 겪으신다고 하는데요. 옆에서 본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A : 견성을 하면 제자를 견성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 치자면 가임능력과 출산능력이 생깁니다. 
제자로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특히 견성을 할 만한 영혼이 아닌 경우에는 수십 번의 다음 생의 카르마를 스승님께서 짊어지시고, 품에 안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보면 모험이죠. 
견성을 한다는 보장도 없고, 견성 후 다시 습에 휘말리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견성인가는 역사적으로 봐도 지구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해 비유로 말씀 하신 적이 있는데,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KTX를 맨몸으로 세워서 궤도이탈을 시키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 만큼 공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쇼라던가 소공자 같은 분들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도를 해보니 엄두를 못냈어요. 
마하리쉬의 경우에는 서너명 인가를 하고 카르마의 역습에 폐병이 걸려 죽잖아요.

초기에 제자들이 견성할 때에는 뉴질랜드와 한국에 지진도 일어났었지요. 
스승님은 붓다가 탄생할 때쯤엔 여러 명이 증언을 하겠지만 육체적으로 봐도 그로키 상태로 보이곤 했습니다. 
요즘에는 여러 붓다들이 광권을 형성해서 인큐베이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인가해 줄 때의 고통이 덜하신 것 같습니다. 
마치 회로가 병렬로 여러 개 연결되어 있으면 약한 대신 오래가는 것과 같지요. 
현재까지 360여명의 붓다 출현은 스승님과 붓다필드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사이비 같은 이야기지만 사실입니다.

사실 붓다필드가 이렇게 수백명의 회원이 있는 단체로 성장할 지는 아무도 몰랐었습니다. 
스승님도 그런 계획이 전혀 없으셨고 
30명 견성했을 때도 문을 닫고 수련에 매진하려고 했었고, 
100명쯤 되었을 때는 정말 게시판에 정식으로 공고를 올리고 비교(秘敎)문파로 가기로 선언을 했었습니다. 
인터넷 접속 자체를 불가하도록 조치를 취하려고 하였었구요. 
완전히 지하로 숨어 들려고 했던 것이죠. 
당시에 굉장히 재력이 있으신 3분이 센터에 방문 하셨을때도 스승님께서 
“조금 늦게 오셨네요. 어떻게 하죠? 저희는 이제 회원을 더 받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가 붓다필드가 문호를 개방한 에피소드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2004년 2월 경인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당시에 여성붓다에겐 임시면허 후 몇 달 간의 인큐베이팅 과정을 거쳐 붓다인가를 새로 내주셨었습니다. 
그날 스승님도 초대를 해서 초창기 멤버들이 스승님께서 저희에게 처음으로 짜장면을 사주신 추억의 짱깨방에서 회식을 하기로 했었지요. 
사실 중요한 모임이었고, 나름대로 가슴 설레어 했었는데 스승님께서 약속장소로 안나오시는 거예요. 
다들 좀 섭섭했지만, 식사를 마치고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겨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요즘 21명의 인가가 동시에 나기도 하지만, 
당시로서는 아주 대단한 사건이 6~7명의 여성붓다가 새로 탄생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집에 와서 스승님께 전화를 드렸는데, 
수화기 저쪽에서 흘러나오는 스승님의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지더군요. 
눈물이 섞인 목소리 같기도 하고 저 세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같았습니다. 
그때 스승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삼덱아… 문을 다시 열어야겠다. 아직 우리를 기다리는 영혼들이 많다. 힘들더라도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은 본인 자신이라는 것을 알려줘야 할 것 같다.” 
이런 취지의 말씀을 울먹이며 하셨습니다.

그날 소위 말하는 빛의 주님, 카르마의 주님들이 스승님을 방문하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정식으로 스승님과 붓다필드에게 호소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직 붓다필드가 비교그룹으로 가기엔 할 일이 너무 많다!!!


Q : 전에 뉴질랜드에서 제자들이 게시판에 올린 글을 보면 스승님의 그림자가 없다는 내용도 있던데요. 해탈과 관계가 있나요? 
A : 
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스승님은 해탈을 보류하고 계십니다. 
실제로 100% 해탈 상태로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스승님은 견성인가를 해주시면서 3년 동안 무척 늙으셨습니다. 
몸이 너덜너덜해졌다고 하시면서 날아갈 것 같아서 억지로 바윗덩어리를 안고 있다는 표현을 쓰시더군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몸이 기화된다고 합니다. 
심지어 법문 도중 잠깐 수련 시범을 보이실 때도 자기 몸 같지 않고 이물감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훅 불면 먼지처럼 날아갈 것 같은 상태와 같죠. 
그런 애환을 느낄 수 있는 글이 붓다게시판에 있을 거예요. 
전생에 3번 이상 견성을 하고 화신불로 온 스승을 만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백천만겁난조우입니다. 
붓다필드 붓다 중 대여섯 명이 전생에도 견성하고 스승님을 만나러 다시 한국땅을 밟은 것은 위대한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열반의 희열을 보류 한 채, 중생의 고통과 함께 하는 자비의 스승을 만나면 올인을 해야합니다. 
실제로 스승님께서는 하루하루 무미건조해 하십니다. 
기화 직전의 스승을 붙잡아 놓을 수 있는 인력은 제자의 가슴뛰는 수행열정입니다. 
오쇼는 지상에 남아있는 자신의 유일한 이유는 붓다필드를 일구겠다는 일념 때문이f라고 했습니다. 
그 일념 때문에 타살이라는 카르마를 불러서 자살을 했잖아요. 
그래야 육체를 입고 태어날 수 있으니까요. 
그는 지금도 개체성을 용해하지 않고 영계에서 지구 진화를 위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쇼의 염원은 스승님에 의해 한국 땅에 닿았습니다. 
실제로 한국에 오쇼를 처음 번역 소개한 분이 우리 스승님이기도 하구요. 
‘붓다필드’라는 우리 이름도 도판서적이라고는 읽어본 적도 없는 한 도반이 견성을 하고 우연찮게 제기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기화직전의 스승님을 물질세계에 붙잡아 놓을 수 있는 인력은 다시 말하지만 제자들의 가슴뛰는 수행열정입니다. 
스승님은 제자들과 도에 대해, 수행에 대해 여가선용을 위해 만난 분이 아닙니다. 
육체를 가지고 신의 의식까지 가는 신의 여정을 같이 가보자는 것입니다.

스승님께서는 제자들이 있는 이곳까지 친히 내려오셨습니다. 
이젠 저희 제자들이 스승님이 계신 곳까지 가야합니다.